불교에서는 흔히 중생의 삶을 생사윤회의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윤회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생사윤회는 깨닫기 전의 모든 삶
깨달으면 벗어나는 임시적 한계
여러 생을 거듭하는 생사윤회는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모두가 숙명통이 열려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생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 윤회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윤회의 고통을 불변의 것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해탈하기 전까지의 경계로 보는 것입니다.
윤회란 우리의 삶입니다. 매일의 삶은 계속 변화하면서 지속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그로인해 고통 받고 또 그것을 후회하지만, 그 상황이 끝나면 앞의 고통을 망각하고 다시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고통 받으며 후회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의 되풀이도 윤회인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몸은 이미 어제의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 이미 다른 삶인 것이지요. 우리의 감정도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의 감정은 이미 이전의 감정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변화하며 되풀이되는 윤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각 종교단체에서 죽음 체험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관 속에도 들어가 보고, 간단한 장례의식도 해보며, 또 죽음을 앞두고 정리할 것들도 미리 경험해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죽음 체험이라는 것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잠’이라고 표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다시 깨어날 것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지 않지만, 다음날 눈을 뜨지 않으면 바로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예고 없이 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죽음체험이라는 것도 거의 소용이 없지만, 아마도 삶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는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미 한 생을 통해서 수많은 생을 사는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꾸는 꿈을 통해서 이미 엄청나게 많은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꿈이라고 무시하며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것은 ‘의식’의 세계만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우리들의 버릇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꿈을 꾸는 경계는 ‘의식의 안쪽’인 ‘말나식’입니다. 흔히 그것을 ‘무의식’이라고도 하고 ‘잠재의식’이라고도 표현하지만, 그것이 작용하는 뿌리는 한층 더 깊은 곳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비밀의 창고와도 같습니다. 모든 체험의 가장 중요한 ‘씨앗’은 아뢰야식에 저장되며, 그것이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스님들(혹은 수행자)은 깊은 선정을 통해서 아뢰야식의 안을 보게 됩니다. 수행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자신의 다양한 과거의 생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숙명통’이라고 하지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아뢰야식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완전한 해탈’이라고도 하며, 완전한 지혜라고도 합니다.
생사윤회란 깨닫기 전의 삶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따라서 깨달으면 당연히 벗어나는 경계지요. 부처님께서 생사윤회의 고통을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어리석음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주어서 모두가 해탈의 삶을 살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바른 신행을 통해 해탈의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송강스님 개화사 주지